| 상처 뿐인 영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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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묘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누군가의 비밀을 훔쳐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면도 있고, 내가 아닌 타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비춰보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정신과라면, 힘들어하는 얘기들이 많으니 내가 겪지 않는 어려움을 같이 느끼는 공감을 해야 진료가 성립되기 때문에 감정의 소모가 많이 일어난다. 백화점 같은 곳에서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할 때 커다란 감정의 소모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을 따로 감정의 노동자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과의사의 감정 소모 또한 어느 직업에 견주어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힘들었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진료한 날이면 그분들처럼 힘이 빠지고 우울해진다. 진료를 하다 보면 집중하기 힘든 날도 있기 마련인데 그런 날은 배로 더 힘들어 진다. 힘든 환자분들을 통해서 인생을 배우기도 하지만, 인생을 무게와 어두운 점을 더 많이 느끼곤 했다.
어느 날 한 여자 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분은 지금 현재도 상황이 좋지 않고, 얘기를 들어보니 철들고 나서부터는 계속해서 힘든 나날들이 이어져 왔다. 그동안 내내 위에서 말한 무게감을 느끼며 얘기를 들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느낌이 덜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많았지만 심하게 덧나지 않았다고 할까? 고름이 나긴 해도 살이 썩지는 않은 느낌? 여하튼 그런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이유가 대략 2가지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우선 그 분이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 삶에 시달려 왔는 데도 세상을 원망하거나 분노감정에 휩싸여 있지 않았다. 그 심란한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 걱정하고 신경을 썼다. 정말 선한 사람 같았다. 선하다는 게 꼭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나쁜 것이 많이 입력되었는데도 마음의 저 깊이에서부터 선함이 느껴졌다. 이런 게 강한 정신력이고 인격의 위대함인 것 같았다. 그 다음으로는 듣는 필자의 마음이었다. 필자도 최근에 글씨가 잘 안 보여서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더니 노안이 왔다고 했다. 불과 1년 정도 만에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서 안경을 맞춰보니 선명하게 보이기는 해도 불편한 게 많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왠지 상실감이 느껴지기 보단 그냥 불편한 정도였다. ‘나도 이젠 할아버지가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마도 노안의 의미가 ‘이젠 책임감에서 좀 벗어나도 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게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항상 뭔가 의미 있는 일, 뜻 깊은 일을 해야 하고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것 같다. 이젠 나도 할아버지가 되어 가니 그런 책임감은 좀 덜 느끼며 살자고 하던 차에 눈도 나빠지고 하니 합리화할 명분을 얻는 것 같았다.
마음을 비운다고 갑자기 일하는 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상처나 상실을 대할 때 애쓰지 않아도 이제까지와는 다를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인다. ‘까짓것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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