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길 사람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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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에 영웅이 나고, 말년의 정조를 보면 초심을 알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려울 때 보이는 모습을 봐야 그 사람의 속마음과 그 동안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요즘 진료실에는 빚독촉을 당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 돈을 떼어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어서 괴로워 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 분들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배신감이다. 사연은 가지가지이지만 뒤에 마지막 멘트는 "돈이야 그냥 애초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배신감은 어떻게 달래야 할 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이다.
예전에는 악인과 선인이 뚜렷이 구분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봐도 그냥 독재정권만 물러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줄 알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좀 다른 것 같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온라인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우울증이나 대인공포에 빠지게 하고 심지어 자살하게끔 만들 정도로 영악하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누군가에게는 아주 나쁜 사람인 20대의 여자 분을 실제로 만나보고 그녀의 청순한 모습에 놀란 적도 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누구든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요즘 세상이 아닐까 싶다.
마음 상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나마 더 순진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그 분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사람을 잘 믿는 마음이다. 자기가 그러지 않으니까, 혹은 경험이 없어서 그 정도까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잘 알던 사람,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나면 그때까지 하곤 반대로 사람들을 아무도 믿지 못해서 피해의식이 생기거나 냉소적인 사람이 된다.
경제 사정이 나았을 때는 그나마 사람들이 '착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점점 살기 어려워지면서 착한 사람들에게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없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이해관계나 피폐해진 심리상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방어능력이 필요하다. 거절하는 능력도 필요하고 적절히 거리를 두는 능력도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할 것이라는 피해의식을 가질 것은 없지만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 할 것이다. 너무 잘 해주고 싶은 마음도 화근이 된다. 연인들이야 뜨겁게 잠깐 사귀다가 헤어질 수도 있지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조금 미지근한 듯해도 꾸준하게 오래 사귀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정도는 알고 있어야 충격이 덜할 것이다. 사람은 약한 동물이고,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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